몽위 전편 (3/5)

2019. 8. 28. 20:02동방/동방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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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주소


몽위 전편 (3/5)

작가: みく

번역: 푸쿠보


태그: 유카리, 메리, 유유코, 렌코

『겁줘놓고 잘난 듯이 굴어봐야 같잖을 뿐입니다. 그것이 교만한 요괴의 어리석음일 테죠.』
                         ――동방비상천:나가에 이쿠


 “유카리님, 괜찮으십니까?”
 
 그 목소리 덕에 겨우 꿈에서 현실로 끌려 돌아왔다. 아직 멍한 시선 끝에는 이쪽을 빤히 들여다보는 란의 모습이 있었다.
 
 “우…… 아아, 좋은 아침……”
 “좋은 아침입니다. 제가 깨워버리고 만 모양이로군요.” 란은 거기서 한 번 몹시 죄송하다는 양, 그렇지만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는 듯이 말을 끊었다. “……그저, 악몽에 시달리시는 듯이 보였기에…… 혹시 어딘가 편찮으신 부분이라도 있으신……”
 “없습니다.”
 
 걱정하는 란을 뿌리치듯 일부러 엄숙한 말투로 말문을 막았다. 그럼에도 이 고지식한 식신은 여전히 불안한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얼굴에 미소를 덧씌웠다.
 
 “그딴 계집년한테 혼을 빨릴 리가 없잖니. 너는 조금 걱정이 지나치구나.”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것보다 빨리 나가 봐야 해. 아무래도 너무 잔 모양이니까.”

 발치에서는 태양빛이 놀고 있었다. 흔들흔들 형태를 바꾸며 반짝이는 그 광경에도 슬슬 익숙해지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란이 머리를 묶어주는 동안 나는 그냥 발치에서 펼쳐지는 연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리쬐는 광선의 각도는 어제보다도 살짝 더 낮았다. 즉 늦잠을 잤다거나 한 건 아니란 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내뱉어버리고 만 것은, 란이 말한 대로 꿈 때문일지도 모른다.
 등줄기에 차가운 것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자면서 식은땀을 흘리다니, 대체 얼마만인지.
 
 “어떠신가요, 유카리님.”
 
 머리 정리를 다 끝낸 란이 드물게 물어왔다.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다급히 의식을 머리카락에 집중시켰다.
 “……앞머리가 살짝 비뚤어지지 않았어? 여기, 여기쯤.”
 “면목 없습니다.”

 곧바로 튀어나온 그 말에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가장 놀라고 있었다. 머리카락에 관한 요구를 하다니 대체 얼마만의 변덕일까? 내가 지시한 부분에 다시 한 번 정성 들여 빗질을 한 후, 란이 손거울을 건네줬다. 거울 속의 얼굴은, 스스로가 생각했던 것보다 얼굴에 빛이 돌아 건강해 보였다.
 란에게 시선만을 던진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모자를 쓰고, 하얀 장갑을 끼운 뒤 부채를 품 안에 넣었다.
 
 “유카리님 말씀대로 제 걱정이 지나쳤던 모양이군요. 유카리 님은 오늘도 무척이나 쾌조이신 듯 여겨지옵니다.”

 갈아입기를 끝낸 나에게 란은 그렇게 고해왔다. 확실히 그 말대로일지도 모른다. 피가 온몸 구석구석을 바쁘게 뛰고, 잠에서 깼을 때 특유의 나른함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필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나 끈질겼던 두통도 오늘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그럼 다녀올게.”

 란은 한 발자국 물러서 깊이 고개를 숙였다. 행복이 흘러 넘치다 못해 겉으로 스며 나오고 있는 듯한 그 용모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답례를 하고 마는 힘이 있었다. 반사적으로 꾸벅 하고 고개만으로 인사하고 나서, 나는 허공에 몸을 녹였다.




 “어머, 마침 잘 오셨네요, 유카리님.”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현관문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누군가 말을 걸었다. 뒤돌아보자 거기에는 사령의 무리와 사이교우지의 계집이 있었다.

 “아아,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게 됐어.”
 “아뇨 아뇨, 오늘도 와주시려나 줄곧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랍니다. 자자, 사양 말고 편히 들어오세요.”

 라고 낙천적인 얼굴로 유유코가 말했다. 그리고 거리낌없이 내 손을 붙잡아 그대로 집 안으로 이끌었다. 처음 이런 짓을 당했을 때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유유코는 주눅든 기색도 없이 “죄송합니다, 제대로 된 예의도 잘 모르는 몸이다 보니.” 라며 웃어 넘길 뿐이었다. 요괴인 자신을 향한 그 무례함을 뭐라고 나무라지도 못하는 고통과 뒤섞여, 그 때 제대로 주의해뒀어야 했다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다.
 유유코의 속내를 떠보기 시작하고 나서 벌써 며칠인가가 지났다. 대충 사이교우아야카시가 조금씩 꽃봉오리를 틔우기 시작해, 전체의 1할 정도 피었을까 한 시점이었다. 한 편 유유코 쪽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매일같이 내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그 사실에 나는 아연실색했다. 아무리 인간이 우둔하다 해도 이건 너무 무구한 것이 아닐지. 확실히 요 근래 줄곧 이곳에 얼굴을 비추고는 있으나, 허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 나의 방문을 손꼽아 기다리는 인간이라니, 그런 게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해도 되는 걸까? 
 실제로, 타인과의 접촉을 지나치게 금지 당한 채, 격리되어 자란 탓인지 이 유유코라고 하는 계집에게는 의심한다 라는 감정이 존재치 않은 듯 보였다. 요괴인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집에 들이고, 그것이 며칠이나 이어지고 있음에도 이상하다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런 대응은 오히려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이쪽의 자존심을 크게 상처 입혔다. 인간이 두려워하지 않는 요괴 같은 건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조차 없기 때문이다.
 
 “바로 차를 내올게요.”
 
 기운차게 벚꽃 색 머리카락을 하늘거리며 유유코가 토방을 나섰다. 저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방금 전까지의 번뇌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저 세상물정 모를 뿐인 계집애 하나 때문에 이렇게나 마음을 졸이다니,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유유코의 주거는 폐허라고 표현하고 싶을 만큼 황폐해진 정자이었다. 짚으로 된 지붕은 여기저기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그것을 떠받치는 기둥에는 벌레들이 제집인 양 둥지를 틀고 있었다. 짚이 깔린 토방도 마찬가지여서 흙 바닥에 그냥 앉아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고, 집은 전체적으로 기울어져 있어 그 어떤 문도 제대로 닫히지 못했다. 얇은 토벽은 움직일 때마다 후드득 거리며 떨어져나갔으며 방과 바깥을 나누는 것은 낡아빠진 병풍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낡긴 했지만 척 봐도 귀중품임을 알 수 있었는데, 그런 탓에 이 황폐한 집과는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 수도에 살았을 무렵의 잔재이겠지. 그 외의 자잘한 세간들도 하나같이 연식 있는 것들뿐이어서 이쪽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도저히 살아가기에 적합하지 않은 공간에 딱 하나. 색채가 있었다. 기둥에 꽃이 한 송이 장식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리 대단한 꽃은 아니었다. 대충 근처에 피어있던 제비꽃 같은 거겠지. 대나무를 꼬아 만든 작은 꽃병은 꽤나 솜씨 있는 명공이 만든 듯 정교한 그물모양이 서로 얽혀, 현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 꽃병에 꽂혀있는 자그마한 제비꽃――그 자그맣기 짝이 없는 존재는 이 황폐한 폐허의 모든 것을 일변시켰다. 그 조신하면서도 소박한 옅은 보랏빛 꽃을 아름답게 보여주기 위해서 집이 스스로 무너진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도 들 지경이었다. 그리 되면 기울어진 벽도 벗겨진 바닥도 천장을 메운 거미줄조차도,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고귀한 것으로만 여겨졌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마법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금이 잔뜩 간 쟁반 위에 아름다운 차기를 얹은 유유코가 병풍 너머에서 나타났다. 찻잔이나 찻잎은 내가 직접 대륙에서 공수해온 것이었다. 처음 집에 초대받았을 때 그냥 맹물만 대접받았었는데, 그때 순간의 변덕으로 유유코에게 줘버린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찻잎을 달이는 방법 따위 유유코가 알 턱이 없었으나, 이해력은 좋은 편인지 이제는 혼자서도 끓여올 수 있게 되었다.
  적갈색 액체가 따라진 잔에 입을 대면서도 나는 줄곧 유유코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일부러 이렇게 접근해서 주거에까지 직접 찾아오는 것도 당연하지만 목적이 있어서다. 첫째로는 사이교우지 집안 녀석들에게 가로채이지 않도록. 그러나 그 이상으로, 이 계집이 가진 힘을 확실하게 파악해두고 싶다는 속내가 있었다. 결계를 맺는 것은 사이교우아야카시가 만개했을 때다. 그때까지 이 후지미의 딸의 저력을――곧 내 것이 될 그 힘을――이 눈으로 확인해두고 싶었다. 정말로 이 나의 먹이가 될만한 가치가 있을지 어떨지를.
 허나 그렇다고는 해도, 굳이 집 안까지 들어와서, 나란히 앉아, 같이 차를 마실 정도의 관계가 될 예정은 없었다.

 “이 ‘차’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맛있네요.” 유유코는 감탄한 듯이 중얼거렸다. “이것도 송나라에서는 이미 널리 퍼진 풍습인가요?”
 “그래.” 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는 그냥 흔해 빠진, 누구나 마시는 거.”
 “설령 그렇다 해도 저한테 이 이상의 맛은 없답니다. 유카리님께서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계셔서, 오히려 이러한 자그마한 행복을 알지 못하게 되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조용히 웃음을 참으면서 유유코는 곧바로 대답했다. 내심 품고 있던 같잖은 우월감을 들킨 것만 같아서, 또 다시 수치심과 분함이 들끓었다.
 ――그렇다. 이 폐허를 드나들게 되면서, 나는 줄곧 회화의 주도권을 이까짓 계집년에게 빼앗겼던 것이다. 물론 그건 착각이다. 이 녀석은 아무 생각 없이 떠들고 있을 뿐이고, 이쪽에서 과하게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일찍이 이렇게 느긋하고 백치인 계집과 마주 앉아 얘기할 기회 따위 없었을뿐더러, 중상모략을 일삼는 무리들과 대화하던 때의 습관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사실은 나의 요괴로서의 자긍심에 상처를 입히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유코에게 사물의 이치라는 것을 가르치고 말겠다는 오기를 품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 요약하자면 고작 그 정도 일이었다. 이렇게 예정을 바꾸면서까지 유유코의 주거에 주구장창 드나들며 눌러앉아 있는 것도, 고작 그까짓 일에 집착해서였다. 그리고 스스로가 그런 유치한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 할수록, 한층 더 이 마음은 수치심과 굴욕감에 물들 따름이었다.
 “뭐 그런 거지.” 나는 힘내서 잘난 채 하듯 허세를 부리며 말했다. “너랑은 살아온 시간이 다른걸. 신선함에서 오는 기쁨 따위, 마지막으로 맛본 게 과연 언제일지.”
 “그래도 부러워요. 전에 얘기해주신 서방의 이야기라던가. 저 따위 것은 평생을 걸려도 알 수조차 없을 이야기들뿐이니까요. 유카리 님만큼이나 힘이 있으신 분께는 별 거 아닌 일이시겠지만.” 

 몹시 유감이라는 듯 유유코가 한탄을 내뱉었다. 그럼에도 그 모습은 마치 연기를 하는 듯이도 보였다. 흘끗 곁눈질로 살펴보았다. 유유코는 차를 홀짝이면서 뭔가 생각에 빠져있었다. 어딘가 울적해 보이는 그 모습은, 방금 전까지 뱉던 아부는 어디로 갔는지, 이쪽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는 듯이도 보였다.
 나는 이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순간순간마다 인상을 바꾸는 이 계집에게 그저 농락당할 뿐이었다. 무심코 깨물 것 같아진 입술을 억지로 뒤틀어 열었다.
 “그러고 보면 어제는 나 혼자 한참을 떠들었었지. 지루했었던 거 아니니?”
 “설마요! 오히려 푹 빠져버렸는걸요! 먹을 거 얘기에는 깜짝 놀랐지 뭐에요! 특히, 저기, 그…… 뭐더라…… 그래, 보릿가루를 개어서 굳힌 뒤 부풀린 다음 굽는 그거라던가!”
 “어머, 그건 쌀을 재배하지 못하는 곳에서라면 어디서든 먹는 거란다. 당 과자랑 똑같아. 뭣하면 다음에 가져올까?”

 저도 모르는 새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들떠있음을 깨닫고 황급히 부채로 입가를 감췄다. 유유코는 “기대되네요!” 라며 깔깔 웃었다. 그것은 장소를 잘못 고른 게 아닐까 싶은 만큼 우아하여서, 도무지 스스로의 숙명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는 듯이도 보였다. 무심결에 부채 밑으로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유유코는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여유를 잃은 적이 없었다. 너무나도 느긋하고 쾌활해서 정말로 이게 그 사이교우지의 계집인지 의심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거기에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봉인을 위한 재물로서의 적성을 확신할 따름이었다. 그것은 일련의 행동의 뒤에 어떠한 강인한 정신력을 느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곁에 있으면 있을수록 여실히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요괴에게 있어서 정신의 강함이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나에게 어떤 종류의 흥미를 돋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나 빈궁한 환경 속에서, 아무리 세상살이를 모르는 무지몽매한 계집이라고는 해도 이리도 아무렇지도 않게 나와 대치하다니. 그것이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터다. 뿐만 아니라 이 계집으로부터 느껴지는, 존경심마저 들만큼 기품 있는 행동거지는 대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것인가, 그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저, 유카리 님.” 유유코는 목소리의 높낮이를 바꿔가며, 눈치를 보듯 이쪽을 들여다보았다. “슬슬 점심 시간인데, 어쩌실 건가요?”

 그러면서 슬며시 이쪽에 몸을 다가 붙였다. 짚 바닥 위로 손을 얽으면서, 밑에서부터 올려다보듯 똑바로 눈을 맞춰왔다. 밤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내 시야를 가득 메웠다. 감추지 못한 동요가 뺨을 내달렸다. 한 순간 찾아온 정적 속에서 왜인지 집에서 나서기 전에 란이 고쳐줬던 삐뚤어졌던 앞머리가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그, 그렇네…… 모처럼이니 먹고 갈까?”
 “그럼 준비할게요!”

 유유코는 화악 하고 뺨을 붉히면서 뛰어오르듯 병풍 너머로 사라졌다. 목 언저리까지 차오른 숨이 어깨에서 새나왔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숨골을 꽈악 쥐어 잡힌 듯한 통증, 하지만 그것은 줄곧 머리에 눌러 붙어있던 둔한 아픔과는 명백히 다른 것이었다. 오히려 유유코와 얼굴을 마주하게 된 탓에 처음으로 맛보게 된 아픔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저주받은 업을 짊어진 초라한 인간 따위가, 이 나에게 어떠한 고민을 안겨주다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생각할수록 이상한 여자였다. 그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왜인지 저것에게는 당연히 있어야만 할 비통함이 존재하질 않았다. 오히려 어떤 종류의 행복감마저도 떠돌고 있었다. 마치 강요 받은 잔혹한 숙업을 받아들이고, 아니 그러기는커녕 그 숙업마저도 사랑스럽다는 듯한, 그러한 달관이 미소 밑에 깔려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저 단아한, 동시에 오만한 행동거지는 그러한 것의 연장선에 있는 것인 걸까. 저 여자는 어쩌면 나를 그저 우둔한 어린아이로 보고는 불쌍한 것이라며 가엾이 여기고 있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혹은 그저, 지금까지 홀로 외롭게 살아온 비참한 계집이 처음으로 친구를 얻어 하늘 끝까지 날아오를 듯이 들떠 있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가능한 잘해주고 필사적으로 애교를 떨며 환심을 사고자 하는 것일 것이겠지.
 정말이지, 제 분수를 모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대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지. 비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허나 그만큼, 이까짓 녀석에게 그리 여겨지는 자신의 무름에 어쩌면 좋을지도 모를 만큼 화가 나는 것도 역시 사실이었다.
 기둥에 장식된 제비꽃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빨려 들어갔다. 무심결에 고개를 숙이고 넙죽 엎드리고 싶어지는 충동과, 그런 것을 생각하고 마는 자신의 발작에 가까운 분노. 상반하는 마음에 길항을 이루는 가운데, 어째서인지 가슴 안쪽에서는 뜨거운 무언가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퍼져나갔다.

 얼마 안 있어서 유유코가 상을 들고 돌아왔다. 거기에 있었던 요리는, 일찍이 내가 먹어온 그 어떤 것보다도 참담한 것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불교를 겉모습만 흉내 낸 탓에 완전히 맛이란 걸 잃어버린 귀족의 상차림을, 변변찮은 재료도 없는 이 환경에서 무리하게 재현하고자 한 결과, 간신히 겉모습만 겨우 갖춘, 끔찍한 맛의 접시가 두 셋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완성도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고 있자니, 일찍이 유유코가 궁중에서 이름을 날렸던 사이교우지의 딸이라는 사실이 불현듯 고개를 쳐들었다. 그걸 깨닫고 말자 눈 앞에서 젓가락을 다루는 그 모습 하나하나가, 갑자기 칙칙하게 보였다. 이 계집과 그 녀석들은 아무런 관계도 없을 테인데.
 방금 전까지 들끓어 올랐던 감각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저 묵묵히 제공된 것들을 입에 옮겼다. 그 식사는 “작업”이라 형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히 여겨졌다. 유유코에게 복종하듯이 순간 순간마다 마음가짐을 바꾸는 지금의 나――그건 그야말로 비웃음거리 그 자체였다.

 “……역시 입에 안 맞으시나요?”

 내 얼굴이 어두운 것을 눈치챈 듯, 유유코가 면목없다는 듯이 물어왔다. 다급히 얼버무렸다. 유유코도 살며시 웃어주었으나, 그건 명백히 그림자가 진 미소였다.
 
 “여기처럼 외진 곳에서는 재료를 모으는 것만으로도 고생이라.”
 “……그렇겠지.”
 “안심해주세요.” 유유코는 곧바로 명랑하게 말했다. “다음엔 좀더 입에 맞을 재료를 준비해둘 테니까요.”
 
 작게 끄덕이며 간단히 예를 표하고 다음에의 기대를 늘어놓은 나에게 유유코도 만면의 미소로 응답했다. 필시 나의 얼굴은 여전히 낙담한 채일 것이다. 나를 향한 저 미소를 대체 어떻게 받아들이면 될지, 그런 사소한 것 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먹을 건 내가 가져올게.”
 
 그러니까, 그런 말을 입에 담아버리고 만 것은, 필시 이 지성이 낳은 것이 아닐 것이다. 마치 겁을 먹은 것처럼, 나는 빠르게 열변했다.
 
 “그러니 유유코는 너무 무리하지 말아줘. 우선 너부터 많이 먹고 건강해지렴. 지금의 너는 너무 야위어서 누군가를 대접할만한 상황이 아니야. 그런 꼴이어서야 모처럼의 미모가 무용지물이잖니.” 
 
 줄곧 미소를 띠고 있던 유유코도, 이때만큼은 여우한테 홀린 듯한 얼굴이 되었다. 순간 암자 전체에 사취가 충만했으나, 다음 순간 곧바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흩어지지 않고 유일하게 남겨진 것은, 왜인지 힘없는 미소뿐이었다.

 “……그렇네요. 말씀하시는 대로에요. 이런 초라한 모습이어서야 실례겠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문득 눈을 뜨자, 거기는 카페의 한 구석이었다.

 언제나 가던 가게의 언제나 앉던 자리였다. 앉은 채로 졸고 있던 것이었겠지. 둥글게 굳은 등골이 끼익끼익 소리를 냈으며 시야는 뿌얬고 입 안에 고인 타액은 점성이 마저 생겨 단내마저도 났다. 마치 온몸이 눈뜨는 것을 거부하는 것만 같아서, 나는 또 다시 내려앉는 눈꺼풀의 맹공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뭐니뭐니해도 요 며칠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이다.

 그 날, 렌코와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헤어진 뒤로의 기억이 전혀 없었다. 이튿날 동이 트기 직전쯤에 나는 침대 위에서 데굴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던 것이다. 평범하게 생각해보면 집에 돌아와서 곧바로 침대에 몸을 던져 잠들었을 터이긴 하나, 침대 위에 널브러진 사지가 방금 막 잠에서 깼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피폐해져 있었다. 발표회를 준비하고 있던 때가 훨씬 더 기분 좋게 아침 해를 맞이했던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 날은 결국 하루 종일 침대 위에서 굴러다녔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공복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팔다리가 움직일 기미도 없었다. 오랜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하는데도 무언가에 옥죄인 것처럼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저 머리만이 바쁘게 돌아가며, 어쩌지도 못하는 것을 끊임없이 생각만 하고 있었다.


 ――확실히, 전에 렌코의 귀향 길에 쫓아갔을 때, 렌코의 본가가 커다란 저택이란 것에는 놀랐었다. 일찍이 이 나라의 중심으로서 군림했던 도쿄에는 지금도 지방의 호족 비슷한 명가들이 즐비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우사미 가도 그러한 집안의 하나겠지, 그 때는 그저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렌코네 집에 머물렀을 때 아주 잠깐 마주쳤던 렌코의 아버지가 이어서 머릿속을 스쳤다. 그 살짝 경박하기까지 한 렌코와 피가 이어져있다고는 생각도 못할 만큼 고지식한 사람―― 대충 그런 인상이었다.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천도 이후의 교토인 나에게 있어서 가부장제니 집안이니 하는 것들은 이미 한참 전에 환상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라 여기고 있었으나, 그 낡아빠진 도쿄에는 아직도 그런 풍습이 남아있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선명하게 뇌리에 떠오른 것은, 그 렌코가 그런 곰팡내 나는 관습에 아무런 위화감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권위 같은 것과는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자유분방을 체현하듯이 살아간다고 여기던 그 녀석이, 당연하단 듯이 집안의 예의란 것에 소화하는 것이다. 끝내는 나에게도 친절하게 작법이란 것을 가르쳐주기까지. 완전히 몸에 배어버린 우사미 가에 대한 충심, 그런 것이 눈앞에 명시될 때마다 한 방 먹은 듯이 멍해졌었다. 그런 구세기적인 행동거지를,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렌코에게서 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중력에 몸을 맡긴 눈꺼풀의 맹공을 어떻게든 물리치며 손목시계에 시선을 떨궜다. 약속시간까지 앞으로 1분. 어차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지각하겠지. 거의 손도 대지 않았던 커피잔에 입을 댔다. 이미 한참 전에 열을 잃은 그 액체는, 그럼에도 내 구강보다는 상쾌한 풍미를 갖고 있었다. 커피 덕분에 되찾은 오감으로 다시 한 번 잡념에 빠졌다.
 
 오늘은 렌코의 졸업 논문 중간 발표회 종료를 축하한다는 것을 명목으로 모일 예정이었다. 슬쩍 얼굴을 비출까도 생각했지만, 아마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닐뿐더러 애당초 렌코와 얼굴을 마주한다는 그 자체가 왠지 망설여졌다. 그 아이가 나를 향해 짓는 그 미소에 어떻게 응하면 좋을지 전혀 상상이 안됐다.
 이제 와서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건지. 그런 거 일일이 머리로 생각해서 하는 것도 아닌데. 그걸 알면서도 나는 그 상황에 놓였을 때의 자신을 끝끝내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렌코와 만나는 건 그 날 밤 이후로 처음이다.
 렌코는 늘 그랬던 것처럼 꾸준히 전화나 메일을 보내주었다. 함께 밥이라도 먹자는 메일도 당연히 왔으나, 컨디션이 안 좋았기 때문에 전부 적당히 둘러대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악수가 되었다. 마지막에는 내 몸을 걱정하는 내용이 쉴 새 없이 오게 된 것이다. 무엇 하나 나에 대해 마음 속에서부터 걱정하고 있다는 성의가 이래도 모자라냐는 냥 여실히 전해지는 내용이라,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읽을 때마다 이 몸이 둘로 쪼개지는 것만 같았다. 그 밤,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던 정체불명의 불안감이 어두컴컴한 침대 위에서 스멀스멀 자라던 것을, 그 메일의 내용이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렌코의 상냥함은 최고의 먹이였다. 뇌수를 좀먹고 비대해져 가는 이 지긋지긋한 두통에게 있어서 말이다.

 “미안해 메리! 살짝 늦었어.”
 “……오늘은 5분 지각이네.”
 “정확하게는 5분 14초이려나. 덤을 얹어주는 건 기쁘지만 말이야.”

 멍하니 사고에 젖어있던 나의 반대편에 렌코가 미끄러지듯이 달려왔다. 완전히 일상다반사가 되어버린 인사를 주고받은 뒤, 평소 이상으로 넉살 좋아 보이는 미소에, 나 역시 미소로 대답했다.
 똑바로 웃고 있는지 자신은 없었다만.

 “그래, 컨디션은 좀 나아졌어?”
 
 렌코가 쓸데없이 기운차게 물어봤다. 그러니까 이쪽도 가능한 기운차게 대답했다.

 “응……그럭저럭, 이려나. 그런 것보다 렌코는 잘 끝냈어? 발표회.”
 “아아, 그딴 거 식은 죽 먹기지.” 렌코는 시원시원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런 것보다 정말로 괜찮아? 왠지 목소리도 기운 없고.”

 역시 내 연기 같은 게 렌코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자신을 향한 찌푸린 얼굴을, 렌코는 농담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반쯤 얼버무리며 쓴웃음으로 대답했다. 필시 렌코의 말에 거짓은 없을 것이다. 기운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것보다”라는 말에도 역시, 거짓은 없을 터였다.

 “아무렇지도 않아. 이틀 동안 잠만 잤더니 좋아졌어. 지금은 그냥 배가 고플 뿐이야. 제대로 챙겨먹지 않았으니까.”
 “그랬구나…… 미안. 내가 억지로 끌고 다닌 게 잘못이었나 보구나. 그 날 메리, 엄청 지쳐 보였었고.”
 “그런 거 아니래도. 렌코랑은 관계 없어. 그런 것보다 오늘은 어디 갈 거야?”
 “으음~, 어쩔까……. 너무 기름진 건 안 좋겠지? 저기, 일단은 말이야, 지금의 메리라도 먹을 수 있을만한 가게를 체크는 해두긴 했는데, 어디가 좋을 것 같아?”

 리본으로 매듭지은 댕기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렌코가 메모를 건네주었다. 리스트를 훑어보는 나와 이쪽의 대답을 기다리는 렌코. 테이블 전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견딜 수가 없었다. 또 그 잡념이, 이틀 전부터 나를 괴롭힌 그 둔한 통증이 조용히 들러붙어왔다. 뭔가, 뭐라도 좋으니 대화를 이어가지 않으면.

 “나는 신경 쓰지마.” 메모를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되돌려준다. “뭐든 먹을 수 있으니까. 그냥 배가 고픈 것뿐이고, 위장이 안 좋은 것도 아닌 걸.”
 “그래? 그럼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너무 많이 잔 모양이야. 얘기하다 보면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그 말이 먹힌 건지, 렌코는 곧 언제나처럼 말을 걸어왔다. 이걸로 됐어. 이렇게만 있으면, 그 이유 모를 불안감에 좀 먹힐 일도 없다. 변함 없이 있을 수 있는 거다.
 그렇게 아무래도 좋을 잡담이 이어졌다. 요 며칠간의 근황보고나 예의 발표회의 상황. 그게 끝나고 나면 늘 그렇듯 오컬트 잡담이다.
 어디서 찾아낸 건지 모를 기묘한 소문이나 사진을 있는 대로 보여주는 렌코에게 내 나름대로의 견해를 표한다. 위트와 성가신 전문용어로 장식한 회화는 수면이 부족한 머리에게 조금 가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의외로 얘기할 만 했다. 필시 이것이 나의 일상이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렌코와 얘기하고 있는 이 순간이, 나에게 있어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인 것이다.
 렌코는 렌코 나름대로 또 좋을 대로 떠들고 있는 듯 하면서도, 늘 이쪽을 배려해주고 있었다. 내가 뭐라 대답할지, 두뇌는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회복 됐는지 가늠하고 있는 것이리라. 들키지 않게 할 셈일 테지만, 그런 거 척 보면 척이다. 눈치채지 못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도 그럴게 나는――.

 “――아 맞아, 저번에 메리가 발표한 내용에서 영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었는데.”  이쪽이 어느 정도 회복했는지 확신한 듯 렌코가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 “『투기』와 『감응』의 관계성에 대해서 말인데, 왜 거기서 존재론이 나오는지 이해 못 하겠어. 예를 들어, 그 다른 누군가와 서로 감응하는 것으로 암시를 얻었다고 쳐봐? 거기에 반응한 당사자가 의식이건 자세이건 하는 걸 바꿔서 앞으로의 미래에 다른 식으로 대처하게 될 것이다, 라는 건 이론으로서는 이해가 돼. 하지만 그 암시에 대한 대응이 사람마다 차이를 보이는 건 그 개개인이 살아가는 사회나 문화에 따른 차이라고 설명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했거든. 즉 환경에 의한 제약. 그런데 어째서, 메리는 하필이면 거기서 주관적인 투기를 꺼내온 걸까, 싶어서.
“의식은 존재에 구속되어 있으니까, 암시도 그러한 존재적인 상황에 구속되어 있을 것이다, 란 거구나.” 나는 여전히 어딘가 붕 뜬 채인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하지만 그래서야 세계는 안 변하잖아? 객관적인 존재를 바꾸는 데에는 역시 개개인 레벨에서의 작용이 구동원으로서 필요해. 특히 이번 같은 사례는, 『당사자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여, 거기에 구속되어버린 상황』이니까, 그들이 있는 그대로를 무저항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우선 선택할 수 없어.”
 “즉, 피드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이야기구나. 세계와 개인간의. 세계는 우리들을 구속하고, 개인은 그 상황 속에서 자기의 존재를 걸고 세계에 저항하고자 한다. 그에 따라 세계는 조금씩 바뀌어간다.”
 “으음…… 기본적으로는 그러려나. 그래도, 개인 대 세계라는 건 너무 간략화한 걸지도. 개인 한 명의 힘으로 세계가 어떻게 될 리가 없으니. 거기에 어떠한 중간 집단을 상정해야만 하는 게 아닐까 싶어.”

 그렇다, 렌코의 말대로다. 현실은 바뀌는 것이다. 낡아빠진 관습 같은 건 이쪽의 행동으로 차례차례 타파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대한 이론은 스스로가 쓴 것이었다. 어째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거냐. 그러니까, 분명, 괜찮을 거야――

 “그 말은 다른 사람의 협조가 필요하단 거야?”
 “그렇게 쉽게 누군가가 도와주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그 정도까지 갈 수 있다면 무언가가 바뀌기는 하겠지. 내가 생각하는 감응론이란 바로 그 계기를 말하는 거야. 알 턱이 없는 전혀 모를 누군가와의 무의식간의 응답이, 개인을 뒤흔들고, 세계와의 접촉 방법을 바꾸게 된다. 그것이 복합적으로 일어나게 된다면, 어떠한 좀더 커다란 변혁으로 진전될지도 모르는 게 아닐까? 그야말로 세계 그 자체가 그 존재 방식을 바꿀 만큼.”

 렌코 역시 깨달을 터이다. 그래, 계기만 있다면. 그렇다면 분명 렌코도――

 “흐으음. 말인즉슨, 자기언급 시스템에 무의식 레벨에서 다른 이가 개입할 수 있는 구조를 끼워 넣겠다는 거로구나. 그에 따라 마이크로 했던 자기 언급은 메조 레벨까지 확장해간다. 근데, 그렇다고 한다면 말이야, 메리는 뭔가 암시 같은 걸 얻거나 한 적 있는 거 아냐? 그 예의 꿈같은 데서 말이야.”
 “……어?”

 암 무서울 만큼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한 것이리라. 렌코는 재미있어하기 보다는 그냥 순수하게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미안. 갑자기 이상한 걸 물어서. 그게, 메리의 가설 속의 『초시공적인 암시』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가장 적합한 건 꿈이겠다 싶었거든. 메리라면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당황하며 덧붙인 건 여태껏 생각해본 적도 없는 질문이었다. 이때만큼은 머리에 들러붙어있던 두통도 어딘가로 날아가 버린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으으음, 그건 어떠려나아…… 어디까지나 암시니까, 명확히 이거다! 하고 알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을까 싶어. 뭐, 이런 눈을 갖고 있는 거랑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나도 생각했어. 그래도 있지, 암시에 대한 무의식적인 응답이란 것은 너무나도 애매모호한 이야기라. 뭐라도 좋으니 가까운 곳에 사례가 있다면 설득력이 좀 더 설득력이 생기겠다 싶었거든.”
 “그런 건 본인에게 묻기 보단 주위에게 묻는 게 맞을지도. 자각할 수 있는 게 아닐 테니까. 그게 내 주변에 있는 사람, 예를 들면 렌코에게 끼친 영향을 확인한다던가, 우리들이 간주관적으로 봐서 변화하고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라고 애매하게 대답하는 머릿속에서는, 완전히 별개의 의문 서서히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나는 렌코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긴 한 걸까. 나는 정말로 렌코에게 있어서 필요한 존재인 걸까.

 “그야 메리랑 만나고부터 이상한 일만 잔뜩 겪게 되었으니, 당연히 나도 이것저것 많이 바뀌었겠지. 하지만 그걸 암시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렌코의 곁에 있을 가치가 있는 인간일까? 렌코한테 나는 필요한 사람일까?

 “나는, 그럴 거라 생각하는데 말이지…….”
 “나도 메리의 꿈 얘기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 렌코는 댕기머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그저, 그 꿈이라는 것이 메리나 그걸 듣고 있는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가 점점 알 수 없게 되어서. 그러니까 메리의 가설을 살리는 데에 쓸 순 없을까 했거든. 맞다, 그러고 보니 요 이틀간은 어땠어? 뭔가 꿈 꿨어? 이 전에 꾸던 꿈에서 이어지는 거라던가! 뭔가 힌트가 될지도 몰라!”

 이 눈은, 이 힘은, 필시 렌코의 인생에 있어서 멋진 만남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이 아이의 흥미를 끌어내고, 분명 어떤 무언가를 촉발했을 것이다. 그럼, 그렇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렌코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아, 아아, 꿈, 꿈 말이지! 물론 꿨어. 이 전 꿈에서 이어지는 듯한 느낌으로.”
 
 안 돼. 하지마. 그건 생각해선 안 되는 거야. 그런 건 상상하고 싶지 않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문질러 없애왔던 그 가능성……. 그게 아니라고 부정 당하는 순간 같은 건 상상할 수 조차 없어.
 아아, 서둘러서 대화를 원래대로 되돌리지 않으면. 요 이틀간 줄곧 내 머리를 짓누르고, 쥐어짜며, 좀먹고 있던 그 의문에서 도망쳐야만 해. 지금은 아까까지 꿨던 꿈에 대한 얘기를 하면 그걸로 됐어. 렌코가 기뻐하는 그 얘기를 하지 않으면.
 봐, 렌코가 기다리고 있어. 언제나처럼 모든 걸 감싸는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내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그걸로 됐어. 그걸로 됐잖아. 이것만 계속된다면 나는 아무 것도 필요 없잖아. 그렇잖아?

 “어, 그러니까, 집 안이었으려나. 장소는.” 어딘가 뒤집힌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기서,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거나 했던 것 같은…… 그치만, 구체적으로 뭘 먹었는지는 잘.”
 “혼자서?”
 “아니. 그, 지난 번에 말했던 그 사람. 벚꽃 색 머리카락을 가진 렌코 정도 키의――.”
 “아아, 그 건드리면 사라질 것만 같다던 그 사람이구나. 같은 사람이 계속해서 나왔다는 점에서 확실히 전에 꾸던 꿈에서 이어지는 건 맞는 것 같네.”
 신기한 감각이었다. 단편적인 기억을 하나 하나 주워 모으고 있을 뿐인데도, 말하면 말할수록 꿈에서의 일들이 선명해졌다. 마치 직소 퍼즐의 조각을 하나하나 끼워 맞추는 듯한 감각. 차의 맛, 초라한 식탁, 그리고 기둥에 장식되어 있던 제비꽃.

 “어떤 집이었어?”
 “엄청 낡아서 폐허 수준인 암자. 타다미도 없고 지붕도 바닥도 그냥 짚이었던 데다가 토방 같은 것도 있었으니까 상당히 옛날이 아닐까 싶은데.”
 “헤에, 그럼 토방과 문간이 따로 있는 구조라는 거네. 가마쿠라나 헤이안 후기쯤 이려나?”
 
 그리고 유유코라는 이름의 벚꽃 색의 소녀. 그 모습,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고결함으로 가득함에도, 그 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했고, 무척이나 순수하고 천진난만한데, 어딘가 공허하고 존재가 희미해서.
 “근데, 신기하게도 불쾌하단 느낌은 안 들었어……. 어딘지 아늑하고 편안하다는 느낌이라.”
 “그랬구나. 옛날 사람들의 주거 환경 같은 건 나도 지식 부족이니까 말이지이. 좀처럼 상상이 안 되는데.”

 그리고 꿈 속의 나는 그 소녀를 어떻게 여기고 있었는가. 겉으로는 업신여기면서도 사실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녀에게 매료되지 않았던가. 이 정열적인 감정, 이 생기 넘치는 기억은 대체 뭘까.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비꼬는 것 같았다. 비아냥거리는 것만 같았다. 꿈 속의 풋풋한 두 사람과 상냥한 렌코, 그리고 한심한 내가, 너무나도 비교돼서.
 
 줄곧 진지한 얼굴로 꿈 얘기를 들어주던 렌코가, 끄응거리며 댕기머리 끝의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침묵이 다시 그 자리를 지배했다. 분함이, 분노가 마음 속에서 끓어올랐다. 꿈 속의 행복한 그러한 모습을 이런 나로서는 도저히 흉내조차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아이를 의심하고 있으니까. 렌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생각할 가치조차 없었다. 렌코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바뀐 건 나뿐. 그 밤, 선고된 그 말은 여태껏 모른 척해왔던 이 추악한 마음을 더 이상 없을 만큼 폭로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 밤부터 파도처럼 이 가슴에 밀려들었다가 멀어지는 욕망. 분수를 모르는 그릇된 믿음과 끝을 모르는 시기와 의심.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상념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딱 하나의 확신만이 결정화 되어갔다. 나는 언제까지고 이 아이와――.

 침착해. 또 말수가 줄었잖아. 뇌수가 질척질척 떡이 돼서, 뭘 말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렌코는 말을 걸어주었다. 하나하나 말을 골라가며,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도록 꿈 얘기에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주었다. 부응해야만 해. 이 다정함에, 이 배려에.

 “그건 그렇고, 뭔가 들으면 들을수록 질투가 나는데에.” 이 쪽의 설명이 대충 다 끝났을 무렵, 렌코는 무척이나 어린아이 같이 웃으면서, “꿈 속의 메리랑 그 여자애, 뭔가 엄청 좋은 느낌이잖아? 아니, 어쩌면 혹시 메리도 걔한테 반해버렸다거나? 그렇다면 말이야.”

 농담이라도 할 작정이겠지. 늘 그랬던 것처럼.

 “그럴 리…… 없잖아.”
 “진짜아? 역시 그럴려나아. 라는 건 꿈의 메리와 현실의 메리가 정신까지도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게 되는 건가. 근데 엄청 미인이랬지? 그 사람.”
 “뭐어, 미인이라고나 할까…….”
 “메리가 그렇게 다른 여자에 대해 얘기하는 건 처음이다 싶어서. 역시 말이지,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엄청나게 신경이 쓰인다 이겁니다요. 응.”

 곧바로 반론하지 못했다. 대답을 기다리던 렌코는 또다시 느슨하게 미소 지으며 하얀 리본을 만지작거린다. 이래선 안 돼. 대답하자. 뭐라도 좋으니까.

 “……그러니까 있지, 메리는 말야――.”
 “……해…….”
 “응? 미안, 지금 뭐라고――.”
 “이제 좀 작작 하라고!!”

 그러나, 한계였다. 살짝 숙인 채였던 렌코가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왜, 왜 너는 늘 그렇게――.”
 “아, 저기, 그, 미안, 메리. ……그냥 살짝 장난친 거 뿐이야, 메리가 그렇게” 

 그렇게 미안하단 얼굴을 해도, 이렇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줘도, 얼마나 신경 써주건 상처받을 뿐이야. 어째서 그걸 알아주지 않아?

 “이제 그만해! 그렇게 착한 척 신경 써줘 봤자 성가시기만 하다고! 짜증난단 말이야!”
 “메, 메리…… 미안, 내가 잘못했으니까 진정해――.”

 테이블에서 튀어 오른 내 손을 렌코가 붙잡았다. 그 감촉, 곧 추억이 되어버릴 그 따스함에―― 견디지 못하고 뿌리쳤다.

 “그러니까, 왜 너는 늘, 어째서 그렇게, 하나도 알아주지 않는 건데…….”

 렌코는 더 이상 뿌리쳐진 손을 들어올리는 것조차 하지 못한 채, 겁먹은 듯 떨고 있었다. 마치 벌받은 아이처럼. 그만해. 그런 얼굴 하지마. 그 순수함이 지금까지 나를 얼마나 비참하게 해왔는지, 대체 왜, 어째서 모르는 거야!
 어느 새인가 나는 울고 있었다.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으면서. 여기서 울어도 되는 건 오히려 렌코 쪽인데.
 렌코는 안전부절 못하면서 창백한 얼굴로 흐느껴 우는 나에게 던질 말을 찾는 듯 했다. 손을 가슴 언저리에서 움츠린 채, 말을 쥐어짜내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입술만을 뒤틀면서.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 발버둥치는 지는 훤히 알고 있었다. “미안해.” 다. 그렇지만 무엇에 관해 사과하면 좋은지조차 알지 못해서, 렌코는 그런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해, 그만해줘…….
 렌코의 눈물 같은 거 보고 싶지 않아. 그건 상냥함이 흘리는 눈물이지 나를 위한 눈물이 아니니까.
 이젠 그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아. 나는 그런, 진심이 담긴 말을 건넬 가치 조차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비참하기 짝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상심한 렌코를 내버려둔 채, 아무 말도 없이 그 자리에서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다른 사람 마음 같은 걸 들여다 봐봤자 실망할 뿐이고, 좋은 일 같은 건 단 한 개도 없는 걸.”
             ――동방지령전:코메이시 코이시







 눈을 뜨자, 그곳은 짚이 깔린 초라한 토방 위였다.

 “깨셨나요?”
 
 바로 옆에서 누가 말을 걸었다. 유유코였다.

 “아아…… 나도 참. 미안해라.”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잠에서 막 깼을 때 특유의 못 볼 꼴을 보이고 말았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유유코도 당황한 듯 타이르며,

“아니, 아니에요, 편히 계세요! 요괴는 밤에 일어나고 낮에 자는 것이 이치인 것을, 고작 저 같은 것 때문에 유카리 님께서 이렇게 일부러 오시게 하고 말았으니.”
 “그런, 그럴 리가 없잖니.”
 “지금 바로 차를 내올게요. 유카리 님은 부디 편히 누워계시길.”

 그 말만을 남긴 채, 유유코는 병풍 너머로 달려나갔다. 마치 이쪽이 동요하리라고 예상했었다는 것처럼. 아직 멍한 머리를 흔든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고작 인간 따위라고 한들 상대는 그 사이교우지의 계집. 사령을 지배하는 힘을 지닌 무시무시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 녀석의 영역 한가운데에서 꾸벅꾸벅 졸기나 하다니 이 무슨…….
 다시 한 번 부릅뜬 시야에 비친 것은 여전히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사령마저 날아다니는 암자였다. 드문 드문 구멍 난 천장으로부터 부드러운 태양빛이 내리 쬐어 얇고 긴 기둥이 몇 개나 생겨나있었다. 몸을 감싸는 봄의 따스함과 나에게는 지나치게 눈부신 태양의 난반사. 벌써 한참을 잤을 텐데 금방이라도 다시 잠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긴 시간을 베고 잔 탓에 주름이 잔뜩 진 모자를 펼치면서 문득 지금 머리카락이 어떤 상태일지 신경 쓰였다. 물론 이 집에 거울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란이 정성 들여 묶어준 뒷머리는 그리 흐트러지지 않은 듯 보였으나, 앞머리는 어떨지 알 수 없었다. 적당히 손으로 머리를 빗어보았으나, 하면 할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작은 손거울 정도는 늘 들고 다녀야만 하는 걸까.
 그러는 동안 유유코가 차기를 들고 돌아왔다. 익숙한 듯 찻잔에 차를 따르고, 나도 그 앞에 마주 앉았다. 적갈색 액체로부터 피어 오르는 부드러운 향기는 봄 잠을 적절히 흔들어 깨워주었다. 슬며시 혀 끝에 남는 떫음과 달콤함. 입 안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는 졸음과 하나로 목 밑으로 집어 삼켰다. 설령 어떤 악몽을 꿨다 할지라도, 이 한잔만 있으면 문제 없다. 온화한 향기가, 따뜻함이 모든 괴로움을 녹여 줄 것임에 틀림 없다고――그리 생각할 만큼 진미였다.

 “잘 마셨어.”

 텅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내뱉자 유유코는 수줍은 듯 속눈썹을 내리 깐 채 미소 지었다.

 “잠은 좀 깨셨나요?”
 “응, 개운할 정도야. 고마워.”
 
  나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뒤늦게 다급히 부채로 입가를 감춘다.
 
 “고마워, 라니…… 유카리 님도 참……. 그러지 마셔요.”

 라고, 살짝 뺨을 붉히며 유유코는 대변하듯이 웅얼거렸다. 스스로가 너무나도 꼴불견이라,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적이 정자를 감쌌다. 유유코는 이쪽을 한 번 힐끗 보고서는, 입을 꼭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내 바로 곁에 기댄 채로, 그렇지만 이쪽을 보는 것도 아닌 정숙한 태도로.
 멀리서 새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반쯤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손꼽아 기다리는 듯한 기색을 비추는 유유코. 그에 부응하고자 뭐라도 하나 화제를 던져볼까 싶었지만, 도저히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이 정적을 깨는 것에 견디지 못할 죄악감을 느낀 것이다.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숨 쉬는 법 조차 잊어버린 듯 허덕이며 스스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째서 유유코 앞에만 서면 이렇게도 작아지고 마는 것인지. 이젠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것뿐이 아니었다. 어째서 유유코와 눈을 마주치면 똑바로 보지 못하고 금새 눈을 돌려버리는 건지, 어째서 유유코한테 걸 말 하나 나오지 않는 건지, 어째서 이렇게도 매일같이 유유코를 향해 발길을 옮기고 마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는 일 투성이였다.
 ――아니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가 여기까지 온 건 어디까지나 확인을 위해서다. 이것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서였지 않은가. 이 녀석의 힘을 측정하기 위해서, 내 격을 올릴 도구로서 유용할지 아닐지를 확인하고 싶어서였을 터다.
 아직 유유코가 무언가를 죽이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이렇게 질질 끌 수 밖에 없었던 거다. 처음에는 요괴인 나를 쫓아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저항할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했었으나, 결국 이 계집년은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 할 만큼 순진한 바보에 불과했다. 그저 그뿐인 일이다. 그렇게 결론 지어버리면 끝날 일 아닌가. 이 녀석의 몸에 베인 사취, 기질의 흉흉함은 이미 싫을 만큼 실감했으니까.

 침묵이 무거웠다. 유유코는 여전히 죽은 듯이 그저 조용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은 황홀할 만큼 요염했지만, 동시에 보고 있는 이쪽이 걱정이 될 만큼 공허했고 수심에도 가득했다. 전율했다. 이 계집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갖춰야만 하는 정신이 닳아 없어져, 완전히 말라 비틀어져버린 건 아닐까. 이것이 짊어진 숙업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도 그 작은 몸을 감싼 이 장엄함은 대체 무엇인가. 대체 무엇이 그리 만들었을까?
 ……역시 있는 거다. 만화경처럼 시시각각 변화하는 이 계집에게는 무언가 뒤가 있다. 내가 꿰뚫어보지 못하는 무언가가. 그것이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의 무지몽매함을 유유코가 암암리에 비난하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 마저 들었던 것이다.

 “유카리님, 배가 고프시진 않으세요? 괜찮으시다면 지금 준비해드릴게요.”

 줄곧 먼 곳을 보고 있던 유유코가, 갑자기 초점을 맞춰왔다. 훤히 드러난 심장을 직접 틀어쥐기라도 하듯이,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이쪽을 들여다보면서.

 “아니, 괜찮아. 그보다 네 쪽이야 말로 제대로 챙겨 먹고 있어?”
 “저는 잘 먹고 있답니다. 유카리 님이 본 적도 없는 재료를 매일같이 가져다 주신 덕분에 벌써 이렇게 살도 쪘는걸요.”
 
 소매로 입가를 감추면서 유유코는 어딘가 기쁜 듯이 그렇게 말했다. 살이 쪘나? 겉으로만 보기에는 영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다른 나라에서 긁어 모은 식료를 유유코에게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을 소량이긴 하지만 입에 대고 있는 것도 분명했다. 허나, 기모노 안 쪽의 이 말라 비틀어진 몸뚱이에, 평균 수준의 살집이 붙은 듯이는 도저히 안 보였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말조차도 유유코만의 일종의 배려일지도 모른다. 내가 먹을 것을 가지고 오는 것에 대한, 그것 밖에 못하는 나에의 최소한의 감사.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더 비참했다. 인간 따위가 배려해주는 이 현실에, 가 아니라. 이렇게까지 해주는 이 아이를, 평범한 인간 수준의 몸뚱이로 만드는 것조차도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다. “야쿠모 유카리”는 고작 그깟 일조차도 하지 못하는 존재였던 것인가?

 “어때요? 이제는 좀 매력적인가요?”
 
 어깨를 좌우로 흔들면서 유유코는 신바람 내며 물어왔다. 입을 다물까도 했지만 곧바로 스스로를 다잡았다. 고작 이 정도 질문조차 답하지 못한 채 도망칠 수는 없었다.

 “……너는 충분히 매력적이야. 그저, 앙상궂은 몸이 안타까웠을 뿐. 앞으로 조금이네.”
 “그런, 가요…… 그렇군요……. 앞으로 조금, 조금인 건가요. 네.”

 라며, 살짝 곤혹스러운 듯이 유유코가 대답했다. 뭔가 포기한 듯한 말투였다. 나는 당황해서, 황급히 화제를 바꿨다.

 “아, 그래, 모처럼 푹 잘 잤으니 산책이라도 하지 않을래? 마침 너도 그 벚나무를 살펴보러 갈 시간이잖니?”
 “아, 네…… 맞아요. 깜박 잊고 있었네요. 그럼…… 가실까요?”

 유유코도 다소 당황한 듯한 기색을 내비치며 수긍했다. 일어서서 손을 잡았다. 까칠까칠한 손바닥. 봄의 양기에 그대로 흩어져버릴 것만 같은 희미한 온기. 유유코가 이쪽에 시선을 향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그 손만이 마음을 전해주었다. 색을 잃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그 생명의 등불을. 나는 그 손을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서자 기분 좋은 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방 안을 충만해있던 사취 가득했던 공기도 싱그러운 춘풍에 다소는 생기를 되찾은 걸까? 울퉁불퉁한 나무에 점차로 색채를 더해가던 벚꽃 잎이 산들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만개까지 앞으로 7할, 즉 3할 정도 피어있다는 느낌.
 유유코는 여전히 시선을 내리깐 채, 어딘가 침통하게 마저 보이는 발걸음으로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 섞이는 연분홍 빛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그 얼굴은 애당초 그런 것에는 요만큼도 흥미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건넬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심결에 꼬옥 쥘 것 같은 손을 풀고 유유코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역시 돌아갈래? 유유코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
 “아뇨, 괜찮아요.” 유유코는 미소로 즉답했다. “저쪽으로 가보시지 않을래요? 아직 벚꽃은 이른 모양인 듯 하니.”

 그러고는 역으로 내 손을 붙잡고 성큼성큼 나아갔다. 또 유유코를 신경 쓰게 했다는 사실에 내장 속에서 분노가 불씨를 틔웠다. 작작 좀 해라. 대체 네놈은 얼마나 더 무력해야 속이 시원할 테냐? 그리도 힘을 갈구하였으면서도, 경계의 요괴라며 숭배까지 받는 주제에, 결국 이까짓 작은 계집 하나 만족시키질 못하지 않느냐. 그딴 네가 대체 뭐가 강하다는 거냐,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 조차도 나오질 않는구나.
 어차피 또 못난 표정으로 유유코를 보고 있었을 테지. 시선을 땅바닥에 내리 꽂은 채 유유코의 손에 그냥 이끌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이끄는 이 손바닥의 온기를 놓치지 않도록 꼭 마주 잡아주는 것뿐. 고작 그 정도밖에 없었다.
 유유코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정자 뒤편의 자그마한 빈터였다. 이곳은 그래도 아직 형형색색의 들꽃이 가까스로 남아있었다. 쓱 보니 아직 지맥의 은혜를 입는 장소인 듯, 기둥에 꽂혀있던 제비꽃도 원래는 여기서 자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유유코는 곧 구석으로 달려가,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둥글어진 작은 등이 너무나도 어린아이 같아서, 멀뚱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내 얼굴도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봄바람은 한층 더 향기롭게 거기에 있는 인간과 요괴를 감싸 안았다. 붉은 리본으로 매듭 진 금실도 바람에 춤췄고 내 몸째로 이 바람에 날아가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유카리 님, 여기 보세요.” 유유코가 쭈그린 자세 그대로 손짓했다. “고양이에요.”

 가보자, 유유코의 앞에는 자그마한 새끼 검은 고양이가 있었다. 길이라도 잃은 건지, 불안한 듯 꼬리를 세운 채로. 유유코의 재촉에 똑같이 쭈그리고 앉아 고양이에게 말을 걸었다. 둘이 나란히 앉아 고양이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그 모습은 옆에서 보면 제법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잠시간의 고전 끝에, 이 버릇없는 꼬마 아가씨는 겨우 내 품 안에 몸을 뉘었다. 유유코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내 품 안에서 뒹굴 거리는 작은 짐승을 바라보았다. 아까 전 내 옆에 있었을 때 보였던 것과는 전혀 다른 눈빛. 잠깐 동안 잊고 있던 아픔이 다시 한 번 따끔, 하고 가슴을 후볐다. 
 예상치 못한 난입자 덕분에 유유코와의 대화에 활기가 생겼다. 동물이란 걸 거의 하나도 모르던 유유코는 내가 여행하며 봐온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면서 귀를 기울였다. 이쪽도 신나서 얘기하는 동안 지금까지의 수 없는 부정적인 감상을 잊은 듯, 떠듬거렸던 말투도 원래의 야쿠모 유카리답게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 기분으로, 빈터를 한 바퀴 빙 돌아 정자로 되돌아가면서, 훵하니 뚫린 한 모퉁이를 지나치던 그때였다.

 “유카리 님, 석산은 좋아하시나요?”

 유유코가 가리킨 그곳은 묘하게 쓸쓸한, 섬뜩한 공간이었다. 풀이 잘아있었을 흙은 몽땅 뒤집어져 있었고 그 탓에 지면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밭으로 보이지 않을 것도 없었으나, 그곳에서 자라나 있는 것은 다른 것도 아닌 석산의 흔적이었다.
 
 “가을이 되면 저쪽은 석산이 흐드러지게 핀답니다. 유카리 님께도 언젠가 꼭 보여드리고 싶습니다만.”
 “으응, 미안하지만 석산은 싫어해.”
 “어머, 그건 유감이네요.”
 “보고 있으면 왠지 기분 나빠져서. 그 꽃.”

 평소였다면 여러 생각을 하며 분석했을 그 대화에 담긴 의미를, 완전히 긴장이 풀려있었던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눈치챌 수 없었다. 그런 나의 태평한 대답에, 유유코는 가볍게 말을 겹쳤다.
 
 “그것도 그렇겠죠. 저곳은 시체를 묻어두는 이른바 묘지인 걸요.”
 
  주춤하며, 내 걸음이 멈췄다. 한 보 늦게 유유코의 걸음도 멈췄다. 깜짝 놀라 굳어버린 나를 향해, 유유코가 무기질적인 미소로 대답했다. 왜인지, 비웃음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전에는 사자니 자객이니 하는 게 오더라도 쫓아내는 걸로 어떻게든 끝났습니다만, 최근에는 힘을 제어할 수가 없어져서요. 하는 수 없이 저기에 묻어두고 있답니다.”
 
 무기질적인 미소를 유지한 채 그렇게 말했다. 그 어떤 감정도 없는, 바짝 말라붙은 목소리로. 그리도 다시 한 번, 이쪽을 쳐다보며 웃음지어 보였다. 이번에는 기쁜 얼굴로.
 
 “그래도 유카리님은 괜찮아요. 강한 분이시니까. 저도 거리낌없이 편안히 있을 수 있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오싹, 유유코가 억누르고 있었던 것을 해방했다. 질식할 것만 같은 사취, 으깨버리겠다는 듯이 덮쳐오는 영압.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지금까지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조금도 무너트리지 않은 채. 그럼에도, 유유코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되어있었다.
 ……당연하다. 바보냐 나는? 모를 리가 없잖은가. 눈 앞의 이 계집이, 자기자신의 힘을 자각하지 못한 채, 천진난만하게 평화롭게 살고 있을 턱이 없잖은가. 낙천적이었던 건, 세상살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멍청이는, 나였다. 내 쪽이었다. 봄의 따스함에, 이 아이의 미소에 넋이 빠져 눈을 돌린 채 바보처럼 헤죽거리던 것은 내 쪽이지 않은가. 이걸 보고 싶었을 것이다. 이게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그럼에도. 어째서. 잊고 있었다. 망각하고 있었다. 외면하고서, 기분 좋은 선잠에 젖어있었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나였다.
 유유코는 웃는 얼굴로 미안하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둔한, 그리고 깊은 빛을 담은 눈동자가, 내 몸을 용서 없이 꿰뚫었다.

 “그 고양이도 유카리님께서 있었기 덕분에 살 수 있었던 겁니다. 만약 제가 품에 안았더라면 이미 죽었을 테니까요.”
 
 팔이, 무릎이 떨렸다. 무엇에? 유유코의 힘에? 유유코가 내뿜는 사취에 인가?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의 우둔함에? 틀려. 그딴 게 아니야. 이 수심 가득한 눈동자에, 다. 이 근심 하나 없는 말에, 다. 그것은 나 따위 것으로는 도저히 알지 못할,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든 강인함을 초월한 무언가 였다. 이건 뭐지? 어떻게 그렇게 있을 수 있는 거야?
 유유코가 내 소매 끝을 살며시 잡아 끌었다. 나를 향한 아주 작은 감사의 말, 오장육부를 안 쪽에서부터 후벼 파내는 듯한 경애. 이 몸을 불태워버릴 것만 같은 고결함. 지금까지의 무수히 많은 잘못된 인식을, 감정과 교체하듯 본능만이 그것과 똑바로 대면했다.

 “미, 안해…….”
 
 가장 놀란 것은 느닷없이 그런 소리를 유유코일 것이다. 순수한 사취의 장막이 춘풍에 섞여 혼탁해졌다. 말한 나로 말하자면, 자기 입이 그런 말을 토해낸 것을 이 시점에 까지도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지면에 내리 꽂은 시선을 들지조차 못했다. 소매에 닿아있던 유유코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저, 저기…… 유카리 님?”
 그 목소리에 눈이 뜨였다. 속박으로부터 풀려난 그 기세 그대로 고래를 들고, 유유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더웠다. 타버릴 것 같이 뜨거웠다. 망설임, 아니 이제는 완전히 짜증이나 다름 없는 표정과 마주하고 나서야 겨우, 나는 목구멍에 걸려있던 말을 끄집어 낼 수 있었다.
 
 “아, 미, 미안!”
 
 하지만 결국 변하지 않았다. 내뱉은 말은 똑같은 말이었다. 그리고, 그 이외의 말을 토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당연했다. 뭘 할 수 있겠는가? 나에게는 이 아이를 위해 눈물을 흘릴 자격도, 이 아이에게 다정한 말을 건넬 만한 힘도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한심하기 짝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망연자실한 유유코를 내버려둔 채 아무 말도 없이 그 자리에서 내빼는 것뿐이었다.




 *




 꿈에서 깨어보니, 침대 위였다.
 
 뺨에 닿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는 감촉이다. 엎드린 채 고개만 옆으로 돌리고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잠을 잘못 자기라도 했는지 둔한 두통이 지끈지끈 머리를 조여왔다.
 머리 밑에서 긴 시간을 베고 잔 탓에 주름이 잔뜩 진 모자를 펼치면서 어슴푸레한 실내를 쓱 둘러보았다. 특별히 인상에 남는 것 없는 흔해빠진 원룸은, 두꺼운 커튼에 밀폐되어 잿빛으로 흐릿했다. 방을 침투하는 여름의 햇볕이 마룻바닥 위에서 하늘하늘 춤췄다……라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저 공허하고, 평범할 뿐인 방이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억누르며 무거운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지금이 몇 시지? 침대 끝에 굴러다니던 핸드폰을 집어 들고 시간을 확인하려던 차에 깨달았다. 착신 이력과 메일이 몇 개인가 표시되어있던 것을. 이 이상 핸드폰을 손에 쥘 용기조차 나질 않아, 그대로 옆으로 던져버렸다. 아직 흐릿한 눈을 비벼,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두 개의 침이 서로 딱 붙어 똑바로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12시였다.
 커튼을 걷을 의욕조차 나지 않아서, 방금 전 겨우겨우 일으켜 세웠던 몸을 다시 한 번 침대 위에 쓰러트렸다. 그저 하얄 뿐인 천장이 눈 앞 가득 퍼졌다. 어떤 행동을 할 기력조차 없으면서 다시 한 번 잠들 용기도 없이, 나는 그저 텅 빈 방의 텅 빈 장식물이라도 된 듯이 침대 위를 굴렀다.
 
 멍하니, 아무래도 좋을 일들이 머리를 스쳤다가 사라졌다. 아르바이트는? 레포트는? 밥은? ――그 모든 것들이 섬광처럼 뇌수를 지나쳐 사라졌다. 이래서야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저 그렇게 아무래도 좋을 일을 반복하고 있자니, 잠을 잠으로서 상쇄했을 상념이 꿈틀꿈틀 끓어오르고자 하였다. 두려움에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아니야. 혼란한 탓에, 그저 머리가 폭주하고 있는 것뿐이야. 그럴 게 틀림없어.
 
 정말로 그럴까? ――지독할 만큼 냉정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게 본심이었지 않았는가. 어젯밤, 번뇌의 끝에 도달한 그 결말이야말로, 진정한 거짓 없는 나였던 게 아니었던가. 체온이 조금씩 내려갔다. 머리 한 가운데의 박힌 핵심이 열을 잃고 그것이 전신을 좀먹는 듯한, 기분 나쁜 오한이 등줄기를 내달렸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평안을 가지고 오기도 했다. 오한과 함께 촤아악 하고 빠져나간다. 힘이, 두통이, 고민이. 마치 마약처럼.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계속해서 시야에 핸드폰이 밟혔다. 잡아 뜯듯이 쥐곤 그걸 그대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두통이 끔찍해졌다. 아아, 안 돼, 진정하자. 그래, 이런 때는 샤워가 최고다. 휘청거리는 몸으로 비틀거리며 샤워실로 뛰어들었다. 별다른 특징 없는 샤워부스, 물때투성이인 수도꼭지, 호수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미적지근한 온수…… 모든 것이 불쾌했다.
 적당히 몸을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머리를 말려야 했지만 모든 것이 너무 억겁이라 결국 손대지 못했다. 어차피 오늘은 아무하고도 만날 예정이 없다.
 또 할 게 없어졌다. 뭔가를 먹고자 해도 뭘 사둔 기억이 없었다. 일단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살풍경한 그 풍경에 짜증이 났다. 이제 됐어. 뭐라도 좋으니 사오자. 그리 결심하며 난폭하게 냉장고 문을 닫았다.
 빨려 들어가듯 침대로 돌아왔다. 시계를 보자 아직 15분 밖에 안 지났다. 절망했다. 어떻게 시간을 소비하면 좋을지 아무런 상상조차 떠오르질 않았다…… 아니, 그건 거짓말이다. 하고 싶은 건 있었다. 핸드폰이다. 읽지 않은 메일, 확인하지 않은 착신이력―― 누군진 뻔하다. 그렇기 때문에 보고 싶다. 보고 싶지 않아.
 그런, 정반대 방향의 힘, 그것이 내 마음을 어젯밤부터 둘로 쪼개놓고 있었다. 폭발하듯 일어서서 벗어놓은 옷과 함께 방치되어 있던 핸드폰을 주우러 갔다. 협소한 방 안을 의미도 없이 어슬렁어슬렁 거리기나 하고,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앞으로 나아갈 용기도 없는 주제에.
 세 번째로 돌아온 침대 위에서, 주워온 핸드폰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하지만 열지는 못한 채 시간만 흘렀다. 스물 스물 형태를 이뤄가는 잡념. 안돼. 이래서야 결국 똑같아. 진정해. 냉정하게, 하나씩 생각하는 거야.

 ――나는.
 우사미 렌코를, 사랑했다.

 이건 이제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어제 렌코에게 울분을 토하며 이 방으로 돌아오고 난 이후, 침대 위에서 울다가 잠들었을 때에는 이미―― 아니, 그런 게 아냐. 좀 더 한참 전에, 진작에 깨달은 것이었다. 그저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한 발 내딛는 게 무서웠으니까. 그러니까 핸드폰 대기 화면에서 기다리고 있을 해맑은 미소를 보고 싶은 것도, 진심이 담긴 그 메일을 읽고 싶은 것도, 혹시 어쩌면 남아있을지 모를 부재중 메시지를 듣고 싶은 것도, 실로 극히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또 다. 마음 속에서 냉소가 울려 퍼졌다. ――메시지? 마음이 담긴 메일? 또 그런 영문 모를 말을 내뱉으며 어물적 흘러 넘길 셈이냐? 좀 더 머리를 써라.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봐라. 정말로 그런 게 있을까?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확인도 안 했으면서 어떻게 그것이 렌코의 것이라고 확신하지?
 그리고, 그러고 나서다. 만에 하나 그것이 렌코가 보낸 것들이라고 쳐보자. 어째서 그것이 “진심이 담긴” 것이라고 딱 잘라 말하는 거냐? 아직까지도 너 좋을 생각에만 빠져 있다는 것에 어째서 깨닫지 못하는 거냐. 잘 생각해봐라. 그 메일은 어제 밤 스스로가 행한 말도 안 되는 폭거에 대한 분노, 매도일지도 모른다. 절교의 메시지 일지도 몰라. 그렇지?
 다시 한 번 머리를 흔들었다. 이번엔 잡아 뜯듯이. 지겹게도 끓어오르는 바보 같은 생각을 지워 없애고자. 나는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곰곰이 잘 떠올려봐. 렌코의 그 미소는, 나를 향한 배려는 어딜 어떻게 봐도 진짜잖아? 렌코가 나를 어떻게도 생각하지 않는다니 그럴 리가 없어. 나를 싫어하거나 나를 버린다거나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도 그럴게 줄곧, 함께였는걸. 단 둘 만의 비봉구락부를 만들고, 둘이서 많은 곳을 여행했어. 많은 것을 나누었어. 그렇게 사이 좋게, 얘기 했었잖아!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유치한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거기에 “진심”이 있었다고 어찌 단언할 수 있는가――그리 생각했기 때문이다. 렌코는 상냥한 아이다. 그건 확실하다. 줄곧 같이 어울렸으니 잘 알 수 있다. 그 아이는, 겁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상냥했다. 하지만 그래서다. 곰곰이 되짚어보자. 그 상냥함이 오직 나만을 위한 상냥함이었는가? 그도 그럴게 그 아이는 누구에게라도 똑같이 상냥하지 않았던가? 부모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친구에게도,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그리고
 “그냥” 같은 서클인 부원에게도――.

 “아니야!!”
 
 비참한 비명이 아무도 없는 잿빛 방에 울려 퍼져 사라졌다. 나는 저도 모르는 새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이게 없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양, 단단히. 꽈악.
 이어서 나올 터였던 말은, 목구멍 언저리에서 가로막혀 어째서인지 그 앞으로 나가고자 하지 않았다. 안돼. 이래선 안돼. 그렇게 쳇바퀴를 굴리면 또 다시 나와버려. “그 것”이. 좀더 추악하게, 좀더 추잡하게.
 애당초 어째서지? 어째서 이런 바보 같은 것만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나는, 렌코를 믿고 있어. 그걸로 됐잖아. 확실히 렌코의 마음 같은 건 몰라. 그래도…… 아니, 그런 게 아닐 터다. 그 아이를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런 게 아닐 터다. 설령 그 아이가 나랑은 전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관계는 유일무이한 것이니까. 그래, 그러니까, 단순한 이야기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따위, 전혀, 티끌만큼도 없는 것이다.
 만약 렌코를 정말로 좋아한다면, 보내주면 된다. 그걸로 집안을 잇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면 된다. 그도 그럴게 렌코는 단 한번도 헤어지자 말하지 않았다. 이별을 말하지 않았다. 도쿄로 가더라도 사이 좋게 지내자며, 연락을 주고받자며, 만날 기회를 만들자고 얘기해줬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 아닌가. 렌코는 나를 버리고 도쿄로 돌아가는 게 아니야. 그 아이는 몇 번이고 나에게 전하고자 했어. 내가 소중하다고, 나를 소중한 “친구”라며――.

 오싹, 오한이 들었다. 또 다. 왜…… 어째서야. 어째서 또 “녀석”이 나타나는 거야. 그 비열하기 짝이 없는, 최악의 최저인 진정한 “내”가――.
 부릅뜬 채였던 눈꺼풀을 내리 깔았다. 맞물리지 않는 어금니를 악물고, 심호흡했다. 폐부에 들러붙은 독기를 남김없이 토해내기 위해서. 이런 때야말로 진정해야 했다. 냉정해져라, 그리고 평소의 “마에리베리 한”으로, 아니, 평소의 “메리”로 돌아가자. 돌아가야만 해.
 ……역시 핸드폰을 확인하자. 그러면 끝날 일이지 않은가. 거기에는 있다. 분명히 있을 것이다. 렌코의 말이. 본심인지 어떨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 언제나처럼, 살짝 애 같은, 그렇지만 명석하면서도 무척이나 상냥한 말이 거기에 있다. 그러니까 핸드폰을 확인하면 된다. 그리고 남아있는 착신이력과 메일을 읽으면 된다. 그걸로 진정할 수 있다. 그래, 그럼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두뇌의 지극히 당연하기 짝이 없는 부름에, 허나, 떨리는 손끝이 응하질 않았다. 마치 손이 핸드폰을 여는 법을 까먹은 것처럼. 무심결에 흘러나온 것은 해선 안될 한탄의 울음. 멸시로 가득한, 자기자신을 향한 추악한 비웃음이었다. 얼마 안 있어 마음이 분노로 불타올랐다. 반으로 쪼갤 기세로 거칠게 움켜쥐었던 핸드폰이 울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온 몸이 펄쩍 뛰어올랐다. 손 안에서 진동하는 그것을, 일그러진 얼굴로 조심조심 살펴보았다. 액정에 표시된 것은 “렌코”라는 두 글자였다.
 핸드폰을 열고자 했다. 손이 떨려서 잘 되지 않았다. 핸드폰을 여는 데에는 지독할 만큼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도 언제까지고 그것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착신 버튼이 어디에 있는지 떠올리는데도 또 한참을 시간을 소비했다. 그럼에도 핸드폰은 계속해서 울렸다. 포기한 듯이, 나는 그것을 귀에 댔다. 
 
 “여, 여보세요…….”
 “메리!? 아아, 다행이다……”
 
 수화기 너머에서 안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냥한 렌코의 목소리. 사랑스러운 그 아이의 목소리.
 
 “저, 저기…… 그게.”
 “메리, 미안. 전화 해서……”
 
 볼품없는 울음 소리를, 허나, 저쪽이 훨씬 더 강했다. 렌코는 더듬더듬 이어갔다. 울먹이는 목소리에는, 그렇지만 의심할 여지도 없는 진심으로 가득했다.
 
 “정말로, 미안해. 내가, 내가 잘못했어. 메리한테 그런 심한 말을…….”
 
 ……그만둬. 어째서 사과하는 거야.
 
 “아, 아니야, 렌코――.”
 “진짜로, 미안. 그러니까, 그게, 응, 계속 내가 메리한테 심한 짓만 하고, 메리의 마음은 하나도 생각 안하고 내 멋대로 지껄이기만 해서, 정말로 미안해……. 계속 말 못하고 있었던 거지, 그러니까 그렇게 화가 나서……”
 수화기 너머로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냐, 틀려, 그렇지 않아. 싫어할 리가 없잖아. 렌코가 사과할 필욘 없어. 그도 그럴게 렌코한테는 아무 잘못 없단 말이야. 잘못한 건, 최악인건, 최저인건…….
 
 “한심하게도 말이야, 어쩌면 좋을 지 모르겠어서. 메리네 집에 가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발이 떨어지질 않아서, 전화니 메일이니,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 정말로 미안해. 그렇지만 이것만큼은 말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어. 똑바로, 사과하고 싶었어. 우선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해야만 하는 건 메리와 직접 만나서 사과하는 거인데…… 미안, 또 나 혼자서 나 좋을 말만 해서.”

 사과해야만 하는 것은, 렌코의 마음을 싸그리 몽땅 무시했던 것은, 한 발 물러서야만 하는 건 나란 말이야.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그쪽이 먼저 사과하는 건데!? 렌코 때문에 여실히 드러나버리고 말았잖아! 나 자신이, 내가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지, 어리석은 존재인지, 비겁한 여자인가가!!
 
 “그러니까, 만약 메리가 용서해준다면, 또 만나고 싶어. 만나서, 화해하고 싶어. 안될까……?”

 안도하고 있다. 나는 지금 안도하고 있었다. 코를 훌쩍거리며 말하는 렌코를, 필시 입술을 초승달처럼 일그러뜨리며 환희하고 있다. 사그라드는 목소리지만 화해하고 싶다고 말해줬다. 렌코는 역시 나를 좋아하는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 의심할 여지 따윈 애당초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해버려. “내”가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이 며칠간, 이 어두컴컴한 방에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그, 그런…… 얘가 뭐래. 다, 당연하잖아…….”

 입이 움직였다. 아아, 끝났다. 움직여버리고 말았다. 그 무시무시한 생각이, 필사적으로 부정해왔던 “그것”이.
 그래선 안 되는데……
 
 “메리……?”
 “그냥 어제는, 조금 컨디션이 안 좋았던 것뿐이야. 나야말로 갑자기 소리나 질러서 미안해. 렌코는, 아무 잘못 없어. 아~무 잘못도.”
 
 믿기지 않을 만큼 순조롭게 내 입이 말을 뱉어냈다. 전화 너머에 있을 렌코가 두려움에 떨었다. 다른 사람과 전화하고 있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으리라.
 
 “그, 그래? 그치만 그 때――.”
 “신경 쓰지 말라니까. 정말 그뿐이었어. 순간적으로 짜증이 나서 그만……. 렌코 탓이 아니야. 미안, 착각하게 해서.”
 
 지금 이 아이는 대체 어떤 얼굴로 내 목소리를 듣고 있을까. 똑같이 안도하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불안이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을까? 그 모습을 보고 싶다는 외설적인 생각이 머리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만나고 싶었다. 렌코와. 렌코의 미소가 보고 싶었다. 직접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닿고 싶었다. ――그래, 이걸론 안 됐다. 전화 너머로는, 이런 대화로는 만족할 수 없어.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 그럼.”
 
 렌코의 목소리가 달아올랐다. 내 상냥한 말을 듣고, 욕망에 점철된 감언에 이끌려서. 안 돼, 렌코, 들으면 안돼. 부탁이야, 빨리, 빨리 전화를 끊어. 끊어줘. 부탁이니까. 렌코.

 “응. 그러게, 그럼 모처럼이니까 말이야…….”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고 싶어. 언제까지고 렌코와 같이 있고 싶어. 도쿄로 돌려 보낼까 보냐. 그러니까, 데려가면 되는 거야. 렌코가 줄곧 가고 싶어했던 “그곳”으로. 둘이서 같이 가면 돼. 그럼 분명 렌코는――.

 “이번 주말에라도 말이지, 오랜만에 멀리 나가보지 않을래? 화해 여행 겸해서.”

 안돼, 안돼, 렌코 안돼, 렌코, 싫어…… 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

 “어, 그건 그러니까, 어딘가에 결계를 폭로하러 가자, 란 말이야?”
 “응, 응. 실은 말이지,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거든. 그, 전에 렌코가 가르쳐줬던…….”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분명 지금 나는 웃고 있다. 이 이상 없을 만큼 추악하게.
 바로 지금 이순간 까지도 듣기 좋은 달콤한 유혹을 계속하며, 방금 전까지 꾸었던 꿈이 이유 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꿈의 나, 유유코에게 “미안해” 라고 말했던 나. 그 충동적인 참회가 잔혹할 만큼 선명하게 머릿속에서 꿈틀댔다. 어째서 렌코 앞에 있는 건 그 “내”가 아닌 걸까. 이런 나야말로 꿈속에 녹아 사라져버리면 좋을 텐데.
 
 씩, 뒤틀린 입술이, 기세 좋게 최후의 한마디를 토해냈다.
 
 “하쿠레이 신사, 라는 곳인데……”
 “하쿠레이라니…… 이전에 가려다가 못 갔던 거기?”
 “응 거기. 그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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